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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배신

기사승인 2019.06.21  22: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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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모습으로 타락한 기회주의 독립운동가라는 부정적 평가’

정 사무엘 교수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총장직무대리
/사회복지학박사)
[뉴스에이=칼럼] 교회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기독교적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십자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 종종 화두가 된다.
 
요즘 들어 어쩌다 한기총이 극우로 편향되고 책임자들은 정치 브로커 마냥 힘께 나 쓰는 자들이라면 아무에게나 빨대를 꽂아대는 그야말로 십자가를 옮겨 버릴듯한 난세의 기류를 직감 하게 된다.
 
이게 만약 암 걸린 한기총이 절벽으로 떠밀리는 시그널이라면 그래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떨어져야하는 교회적 방법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특단의 긴급조치를 선택할 것인지가 아마 작금 한기총 관계자들이 직면 하고 있는 딜레마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목사 되기 좋은 대한민국에서 너무 쉽게 목사 된 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만들어 낸 근거 빈약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가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내용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자이며 친일 극우독재자로 이미 역사가 평가한 사람이라 특별히 다툼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전광훈 목사가 너무 자주 주장하는 왜곡되고 이데올로기적 편견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치적을 보면서 여기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따라 내용을 다시 한 번 짚어 보고자 한다.
 1. 배경

우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굴욕으로 몰았던 역대 군주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파천했던 선조, 병자호란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 다니다 결국 삼전도의 수모를 겪었던 인조, 조선말 왕궁을 포기하고 아관 파천했던 고종, 그리고 6.25때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뒤 도피했던 이승만,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굴욕으로 이끈 4명의 군주 중 마지막 한 명이 바로 이승만 이었다.
 
조선 말 몰락한 양반 출신 이승만(1875~1965)의 아명은 승룡, 호는 우남 이었다. 황해도 평산 에서 양녕대군의 16대손 출신으로 15세 때 박승선과 혼인하여 6대독자 봉수를 출산(1906년 미국에서 병사)하고 가문의 회복을 위해 조선말 과거시험에 십 수차례 응시했으니 번번이 낙방했던 이승만은 신학문으로 눈을 돌려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배제학당에 입학, 서재필로부터 신학문과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와 영어를 배우다 사회개혁에 개입하여 경무청에 체포되고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1899.1-1904.8) 수감생활 중 영어성경을 읽다가 회심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유영익, 2002)
 
2. 도미
이승만은 출감 후 1904년 11월 4일 구국 비밀외교형식으로 민영환과 한규설의 서신을 들고 하와이를 거쳐 워싱턴으로 도미하게 되지만 (고종의 밀사 임무란 설이 있으나 관료들의 개화를 위한 밀사임무였다.) 이듬해인 1905년 2월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편입학 하면서 목회자를 위한 특별 장학금의 수혜를 받고 두 달 뒤 4월 28일 부활절 날 햄릿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이정식, 2002)으로 그의 도미 목적은 개인적 성취나 영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에 진학했지만 과목낙제로 인해 석사졸업이 유보되고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10년7월18일 윌슨총장으로부터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하버드 대학측에게 낙제과목을 재수강하여 학점취득을 조건으로 동년 2월23일, 하버드대 석사학위를 요령껏 취득했다.
 
3. 귀국과 2차도미

학위취득 후 동년 10월10일 도미한지 5년11개월 만에 이승만은 서울에 입성하여 종로의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총무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 직전 로비를 통해 미국 기독교감리회 4년 총회에 한국대표로 이름을 올려 3월 26일 미국으로의 종교적 망명의 길에 오른다.
 
서재필의 협조아래 하와이에 둥지를 튼 이승만은 월간잡지를 창간했지만 교회와의 불협화음으로 감리교회를 이탈 ‘신립교회’(후일 한인기독교회)를 개척 설교를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갔다. 결국 그는 한인사회 교회분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치활동을 겸하는 이중적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 후 워싱턴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이승만은 외교독립운동을 펼치면서 대통령을 사칭하던 중 1919년 9월경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이 되긴 하지만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에는 잠간 머물렀을 뿐 주로 미국에 거주하였고 미국정부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유영익, 1994) 그 후 1921년 국제연맹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한 희대의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는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1933년 25살 연하인 호주의 프란체스카 도너와 재혼하면서 임정의 주미 외교 위원부 위원장으로 복귀한다.
 
3. 미군정

1945년 한국이 해방되면서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면서 종교 관련법등을 개정하게 되었고 남한은 자연히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친기독교 종교정책이었지만 불교나 천주교 그리고 무당이 굿을 할 수 있는 장소(15곳)도 지정하여 허락되었다.
 
광복 두 달 만인 10월 16일 당시 70세였던 이승만은 33년 만에 다시 서울로 귀환하지만 미군정사령관 하지와 맥아더는 이승만과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함으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 사이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독립 동지였던 김구를 배신하고 조봉암을 사법살인하고 조병옥의 의문사..등 주변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동지들과의 마찰과 반목 또한 끊이지 않은 상태로의 삶을 살았다.
4. 이승만정부와 기독교

이승만은 한국의 기독교국가 건설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생한국을 기독교국가로의 전향에 노력을 한 흔적이 많기 때문이다.(우남실록편찬회, 1976).
 
개신교에 대한 특혜 등으로 기독교인 국회의원의 비율이 20%를 넘나들었고 전국교회에 교회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거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활동을 폈다.
 
교회의 선거개입의 원칙적 문제는 무시하고 수단방법을 불문하되 기독교 인물 당선에 총력을 기울였던 이런 이승만의 정치적 자원 남용과 직권남용이 아마 지금 한기총에서 전국을 253개 구역으로 조직하는 이면에는 이런 과거의 영향에서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기독교 우대정책은 당시 정부요직중 약 40%가 개신교인들로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형목제도, 군목제도, 경찰전도, YMCA등 종교단체후원, 기독교 방송 등을 배려하고 기독교 우월정책을 꾸준히 실시했다.
 
여기에서 한기총 전광훈목사가 주장하는 이승만의 건국정신 중 기독교 입국론은 엄밀히 말하자면 국가통치원리의 왜곡과 더불어 역시 대한민국 헌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대목임을 알 수 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폭력적으로 무력 진압함으로 권위의 도적을 받기 시작한 이승만은 대통령낙선의 위기를 직감하고 대통령제의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추진하면서 정당과 국회의원들로부터도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대 그리고 폭력조직까지 동원 야당의원들을 감금, 위협은 물론 여순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보도 연맹등의 사건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는가 하면 6.25 전쟁중에는 발췌개헌안 통과 사건인 ‘부산정치파동’과 2차 개헌인 소위 ‘4사5입 개헌’을 계기로 공포정치를 주도하던 이승만은 결국 그의 정치적 인생의 종말을 눈앞에 두게 된다.
 
1960년 4.19의거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측근 이기붕과 그의 가족들이 자살하는 등 대통령하야가 아니고는 사태수습이 불가한 상황에 이르자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 향연 90세, 1965년 7월 19일 영면함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의 막을 내렸다.
 
2019년 1월 29일 30회기 총회에서 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된 전광훈 목사는, 대한민국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이론에 근거하여 건국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그의 후보연설에서는 물론 당선소감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열변하고 있다.
 
농지개혁과 평화 선포 등 초대 건국대통령으로서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반해 독선과 이기적 모습으로 타락한 기회주의 독립운동가라는 부정적 평가의 비중이 훨씬 높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명운을 쥐고 있었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저 ‘뻘 소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리고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과거와 오늘과 미래는 한국역사를 배신한 이승만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강하게 믿는 이름도 빛도 없는 무리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한 한기총의 존속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의 희망 또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임에 한 표를 던진다.

뉴스에이 이광원 lwk@new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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